[단비 소리뉴스] ㉚ 원전지역 사고대비 실태

마을 단위로 웅성웅성 버스에 오른 주민들. 처음엔 대피 훈련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모였다가 ‘발전소가 터졌다’는 얘기를 듣고는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어린아이를 끌어안는 젊은 엄마, 버스에 같이 타지 않은 아들 때문에 애를 태우는 노모. 버스 운전대를 잡은 처녀는 어떻게든 원전에서 멀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지만, 곧 망연자실합니다. 너나없이 몰려나온 차들 때문에 다른 도시로 나가는 길이 꽉 막혀버렸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몰려오는 방사능 구름.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달아나지만 얼마 못 가 여기저기서 토하고, 쓰러지고, 다른 이들에게 떠밀려 넘어집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영화 속 상상’일 뿐일까

2016년 개봉한 영화 <판도라>의 일부 장면입니다. 가상의 원전 재난을 다룬 이 영화에 관해 찬핵 전문가들은 ‘과장이 심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경주 월성원전 등 핵발전소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실제로 사고가 일어난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제가 학술적으로 계산한 바에 의하면 원전사고로 방사능이 밖으로 누출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7시간입니다. 그 안에 대피해야 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어요? 세월호 사건 같은 국가 재난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들은 트라우마가 있어요. 집에 가만히 있으란다고 집에 있겠어요? 다 서울로 갑니다. (월성원전 인근 100만, 고리원전 인근 300만) 누가 통제해요? 안 발생할 거라고 우기지 말고 논리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경주시에 캠퍼스가 있는 동국대 원자력에너지시스템공학과의 박종운 교수가 2017년 10월 10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태처럼 핵발전소에서 전체 정전이 일어나 ‘셧다운(작동중지)’ 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사고 진행 시간을 추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신고리원전 5·6호기를 기준으로 핵연료봉이 녹아 압력용기를 뚫고 나온 뒤 격납용기 안에 쌓이는 ‘멜트스루’가 일어나는 데 3시간, 그곳을 둘러싼 원자로격납고의 압력이 올라가 파손될 때까지를 10시간으로 계산했습니다. 3시간과 10시간 사이, 즉 공기 중으로 방사성 물질이 나오기까지 7시간 안에 사람들이 대피해야 피폭을 면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모든 경수로(감속재로 물을 사용하는 원자로) 원전에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데, 월성원전과 같은 중수로(감속재로 중수를 사용하는 원자로)의 경우 조금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격납고의 설계 압력이 더 낮아 더 빨리 깨지기 때문입니다. 또 지역의 인구밀도와 상황에 따라 피해 규모가 다를 수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대체로 방사능이 대기에 누출되기 전 7시간이 ‘골든타임’이라고 볼 때, 월성원전의 경우 반경 30킬로미터(km) 내에 사는 경주, 울산과 포항 일부 지역 주민 약 100만 명이 이 시간 안에 위험지역을 벗어날 수 있는가가 문제의 초점입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원전 반경 30km를 상한으로 해서 각국이 상황에 맞게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지정하도록 권고하고 있으나 환경단체들은 비상계획구역 범위가 '최소 30km'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다울 그린피스 선임캠페이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후쿠시마는 (사고 당시) 강제피난구역이 20km, 권고피난구역이 30km였는데, 이후 실제로 보니 최대 40~45km까지 고농도로 오염된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런 현실을 감안해서 최소 30km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현재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30km로 정하고 있습니다.

일단 ‘자가용 등으로 알아서 대피’가 원칙

“대피 개념이라는 게 일차적으로 지정은 마을별로 돼 있지만 일단 자가 대피가 원칙입니다. 스스로가 다른 지역으로 갈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친척 집으로 갈 수도 있는 거고.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자기 차량을 이용해서 자가 대피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고요. 예를 들어서 거동이 불편하다든가 차량이 없다든가 이런 분들은 차량을 지정해서 또 (저희가) 2차적으로 대피를 시키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자기가 대피하고 싶은데 일부러 집결지에 모여서 이렇게 갈 필요는 없잖아요.”

경주시청 원자력정책과 박대선 원전방재팀장은 2017년 9월 28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재난 대피계획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박 팀장은 자가용 차량이 없는 주민들을 위해서는 관내 군부대 차량이나 관광버스 등을 동원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버스회사 연락처 등 관련 정보를 확보해 두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대상 주민들의 자가용 차량 보유현황 등에 대해 파악된 자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고가 났을 때 과연 즉각적으로 차량 수요를 파악해 신속히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입니다. 특히 대피구역 내 주민들이 개별 차량으로 일제히 이동할 때 영화 <판도라>와 같은 도로 정체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당시 비상조치구역인 30km 반경 내 주민은 13만 5천여 명이었습니다. 또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 30km 반경 내 주민은 16만 명이었습니다. 후쿠시마의 경우 일본 정부가 원전사고의 심각성을 부인하다 점진적으로 대피명령 구간을 확대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대피는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두 달여 동안 점진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현대 도시에서 100만 명가량의 대규모 대피가 몇 시간 안에 이뤄진 전례는 아직 없는 셈입니다.

비상대피구역 내 주민들이 유사시 ‘어디로’ 갈 것인가도 문제입니다. 경주시가 지정한 20개의 구호소 중 원전에서 30km 반경 밖에 위치한 곳은 8개소뿐입니다. 예를 들어 3050명의 이재민을 수용할 수 있는 경주실내체육관은 원전에서 불과 25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긴급보호조치계획구역(UPZ) 설정이 지자체별로 재난대비의 효율성 등을 고려해 원전반경 20~30km범위에서 유동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경주의 경우 원전 반경 22~28km밖에 구호소를 정한 것이란 설명입니다. 경주시가 긴급보호조치계획 구역을 25km로 할 경우 피난대상 주민은 5만 3천여 명이지만 30km로 할 경우 19만여 명으로 급증합니다.

26만 경주시민 방사능 방재 훈련 예산 1억6천만 원

원전에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주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까. 경주시의회 정현주(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사시에 본능적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2016년 경주 지진 후에도 구호소 리스트만 뿌릴 뿐 세부적으로 시행해보는 등의 변화는 없습니다.”

주민 신용화(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에서 아이들한테 대피훈련 시킨다고 몇 번 한 것은 기억나는데 별로 실질적인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외곽 지역에 있어서 마을 방송이 잘 들리지도 않고 훈련한다는 공지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한수원 사람들 많이 사는 양북면은 방송시설이 좋은데 우리 양남은 힘이 없으니 방송시설 개선해달라고 해도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반면 경주시청은 2016년 지진 후 방사능 방재훈련을 강화했다고 밝혔습니다. 박대선 원전방재팀장은 2017년 8월 22일 실시한 을지대피훈련에 ‘방사능 누출에 따른 주민 대피’ 등 원전방재 관련 항목을 추가했다고 말했습니다. 비상계획구역 내 주민 중 300여 명을 선정한 뒤 환자후송 등 필요한 훈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실제 대피 훈련 등에 대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들기 때문에 지자체 수준에서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경주시의 방사능 방재 예산은 교육·훈련 집행액이 2016년 9152만 5000원에서 2017년 1억 6525만 원으로, 장비구입 집행액이 4억 713만 원에서 5억 1640만 원으로 늘어난 정도입니다. 2017년 8월 3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훈련에 이미 4000여만 원이 들었다고 박 팀장은 밝혔습니다. 한편 경주시는 20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23일까지 월성원전 방사선비상계획구역 주민 5만 4000여 명을 대상으로 방사능 방재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방재교육에서는 원전비상시 주민 행동요령과 집결지, 구호소 현황 등을 설명했습니다.

2016년 연말 기준으로 경주시가 갖추고 있는 방사능 방호 물품 및 방재 장비를 보면 주민보호장구가 2만 9310세트, 방재요원보호장구가 70세트, 갑상선방호약품(요오드) 45만 7990정, 방사선(능) 측정기 360대, 고정형 환경 방사선 감시기 25대, 이동형 환경 방사선 감시 차량 1대, 공기 시료 채집기 1대 등입니다. 박 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013년부터 개당 1만 5000원 상당의 방재복을 마을회관 등에 비치해 놨습니다. 방사능 피폭으로부터 100% 보호는 불가능하지만, 공기 중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방재계획에 따르면 비상 상황이 발생한 경우 원전 인근 주민들은 일단 방호 물품이 있는 마을회관 등 집결지에서 보호장구와 약품 등을 받아 마을별로 배정된 구호소로 이동합니다. 박 팀장은 방재복을 개별 가정에 나눠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중한 소지품도 집안 어디다 뒀는지 잊어버리기 쉬운데, 방호 물품은 매년 전수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관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유사시에도 마을회관 등에 보관했다가 전달할 시간이 충분합니다.”

근본적 대책은 원전을 줄이는 것

그러나 정현주 의원은 경주시의 방사능 방재대책이 불충분하다며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월성원전 인근) 동경주 주민을 대상으로 실제 소개(피난) 훈련을 해 봐야 합니다. 또 (유사시에) 이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광역 지자체를 총괄할 수 있는 협조 체계도 만들어야 합니다”

정 의원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지난해 경주 지진과 태풍 당시 도로, 터널, 상하수도 등의 관리 책임이 각 기관에 분산돼 있어 주민들 입장에서 문제 해결이 어려웠습니다. 관련기관 간 소통을 원활히 해야 합니다.”

박종운 교수는 ‘7시간 내 대피’를 주장하는 자신과 달리 한수원 측에서는 방사능이 대기에 누출될 때까지의 시간을 ‘30시간에서 50시간까지’로 잡는다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를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자동차를 살 때 정면충돌하면 어떻게 될까를 걱정하지, 시속 30km로 달려 벽에 부닥쳤을 때 어떨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가 최대의 위험인지를 보고 거기 대비해야 합니다.”

“(원전 재난을 막는 데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원전을 줄이는 수밖에 없어요. 발전소가 많아지면 사고확률이 높아집니다. (한 군데) 몰아 지으면 안 됩니다. 국가가 철학을 가지고 ‘이것은 위험해서 안 된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당장 원전을 다 닫자는 게 아니고) 천천히 줄이면서 재생에너지로 대체해 가자는 것, 국민들 안전하게 하자는 것인데 왜 이걸 반대하나요.”

한편 윤석열 정부는 2022년 7월 5일 국무회의에서 원전의 발전 비중을 30% 이상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에너지 정책 방향’을 의결했습니다. 윤 정부는 2030년에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원전 10기의 수명을 연장하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추진 중단된 신한울 3·4호기 건설도 조속히 재개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출처: 마지막 비상구(제정임 엮음)

목소리 출연: 유지인 김은송 목은수 박시몬 안재훈 기자

영상편집: 유지인 기자

디지털 시대의 멀티미디어 실험에 앞장서는 <단비뉴스>가 ‘소리뉴스’를 시작합니다. 2020년 ‘올해의 환경책’으로 선정된 <마지막 비상구>를 환경부 기자들이 목소리로 전합니다. 이 책은 <단비뉴스>가 2017년 9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연재한 ‘에너지 대전환, 내일을 위한 선택’ 시리즈를 엮어낸 것입니다. 석탄·석유·원전 등 기후위기와 방사능재난을 부르는 ‘위험한 에너지’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할 길은 무엇인지 모색했습니다. 소리뉴스는 이 책 중 3부 ‘에너지 대전환은 가능하다’부터 시작합니다.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기후재난의 현장을 조명하고, 파국을 막을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입니다. 탈원전 논란과 에너지정책을 다룬 1, 2부는 그다음에 이어집니다. 이 기사들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올해의 좋은보도상’과 데이터저널리즘코리아의 ‘올해의 영데이터저널리스트상’을 받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을 포함, 더 많은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시작하는 단비 소리뉴스. 주 1회 <단비뉴스>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실립니다. (편집자)

① ‘기후붕괴 시대’ 위협받는 삶의 현장

② ‘세계 4대 기후 악당’ 한국이 받는 벌

③ ‘트럼프의 훼방’에서 파리협정 살리기

④ 달려가는 유럽, 끌려가는 한국

⑤ 화석연료 줄여도 경제는 쑥쑥 성장

⑥ ‘1달러 골리앗 크레인’ 탄식 뒤의 기적

⑦ 실업자 없는 에너지 자립촌 펠트하임

⑧ 재생에너지가 이끄는 유럽 최강 경제

⑨ 태양광·풍력으로 프랑스에 전기 수출

⑩ 석유파동 후 세계 1위 풍력기업 탄생

⑪ 거리엔 자전거 물결, 국민 건강은 '쑥쑥'

⑫ 태양열과 소금으로 밤에도 전기 생산

⑬ 금융위기에 흔들린 재생에너지 강국 스페인

⑭ ‘바람은 모두의 것’ 제주의 실험

⑮ ‘주민 배제’가 ‘결사반대’ 낳았다

⑯ 해상풍력 잠재력, ‘조선업 이상’

⑰ '원전 줄이기' 시동 건 햇빛발전협동조합

⑱ 의도적 허위정보가 반감 조장

⑲ 옥상·주차장·도로 등 태양광 설치할 곳 수두룩

⑳ 무심코 쓴 일회용품이 기후재난 재촉한다

㉑ 플라스틱 등 자원 순환에 인공지능도 출동

㉒ 내가 버린 플라스틱, 내 식탁으로 돌아온다

㉓ 태양광 전기, 지열 냉난방으로 에너지 자립한 집

㉔ ‘에너지 덜 쓰고 전기 만드는 건물’ 속속 의무화

㉕ 태양광발전, 빗물 순환으로 ‘친환경 건물 시대’

㉖ ‘주민 안전’과 ‘일자리’, ‘이주권’ 맞섰던 원전 논쟁

㉗ 체르노빌·후쿠시마도 ‘안전’ 자만하다 터졌다

㉘ 생존배낭 챙겨 두고 ‘쿵’ 소리에도 깜짝

‘큰 지진’ 가능한 연약지반에 줄줄이 들어선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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